1 기록 없는 先秦史를 기록 있는 선진사로 바꾸려는 중국의 속셈
지금 지나(支那, 현재의 중국)는 거대한 지나의 땅을 여러 섹터로 나누어 그 지방에 맞는 역사를 복원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 지금까지 해온 하화(화하)족 중심의 역사를 구축해온 학문방법과는 다른 학문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나는 지나의 역사를 선진사先秦史와 후진사後秦史로 나누어, 역사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진사로 분류해 왔고, 역사기록이 있는 시대를 후진사로 정리해왔습니다.
지나는 선진사의 시대를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선씨족시대, 씨족시대, 봉건시대로 나누어 왔습니다. 선씨족시대와 씨족시대가 지나에서 말하는 신화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삼황오제시대라고 해왔습니다. 이 시대를 신화시대로 분류한 만큼 지나의 정사에서는 배제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동북공정·서북공정·단대공정, 탐원공정 등을 내세우며 지나가 기존의 분류를 무시하고 이들 공정이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에서 고고학발굴의 성과를 역사화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단고기>류의 역사기록과 <부도지>의 역사기록이 대륙 전체와 유라시아 전체의 역사를 섭렵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가 발굴해 온 고고학 유물과 <한단고기>류의 역사기록과 <부도지>의 역사기록에 우리의 역사를 일치시키고,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구려의 역사를 지나의 역사라고 우기듯이, 우리의 마고지나사, 한국사, 배달나라사, 단군조선사, 예맥사를 자기의 역사라고 우겨대기만 한다면, 우리가 여기에 대비하지 않은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나는 앞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를 답변자가 예측한 방향으로 진행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고지나사, 한국사, 배달나라사, 단군조선사, 예맥사는 고구려역사와 발해국의 역사와 함께 몽땅 지나의 역사로 넘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저들의 프로젝트진행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배달나라역사와 신석기시대의 홍산문화의 관계
엠파스 블로그 <행복이>에는 “환웅시대의 석기문화 고고학의 재조명 <한웅시대와 신석기문화>”라는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웅시대를 신석기시대의 홍산문화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행복이>는 한웅시대의 신시神市가 현재의 홍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 근거로서 홍산에서 구석기시대문화와 신석기시대문화가 융합하다가 농경문화에 대체된다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농경문화의 발달이 교환경제를 촉진시키므로 신시가 발생하였다고 보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고 생각됩니다.
구석기시대말부터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1만년 동안 남부시베리아와 몽고, 북만주일대의 평원지대에서 수렵과 어로가 행해졌고, 세석기細石器를 사용하는 세석기문화가 퍼져 있었습니다.
지나 북부지역, 발해연안, 요동반도, 남만주 일대에서 농경을 시작할 때까지 구석기시대의 세석기문화가 이어집니다. BC 6000년경부터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대형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문화가 시작됩니다. 이리하여 구석기시대의 세석기와 신석기시대의 대형석기를 함께 쓰는 문화가 이어집니다. 이러다가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융합된 석기문화가 농경문화로 대체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발해북안과 만주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농경문화에서 신시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3 신시는 어디에 있었나
홍산문화는 BC4000년경에 있었던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문화입니다. 맨 먼저 황하유역에서 신석기 전기에 해당하는 BC6000년 경에 자산磁山문화와 배리강裴李崗문화가 생성됩니다. 그 다음 같은 시기에 앙소仰韶문화와 홍산문화가 생성됩니다. 이 두 문화는 물고기와 문양을 채도彩陶한 문화입니다. 홍산문화 발생 이후에 하가점문화가 나옵니다. 하가점문화는 후에 나오는 황하유역의 문화와 산동반도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나는 지금까지 황하중심문화전파론을 펴왔는데, 환황해권역環黃海卷域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지방에서 다양한 유물이 발굴됨으로 황하중심문화전파론을 지양하고 다중심발전론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이 문화의 지역적인 특징은 발해연안에서 동시에 문화가 발생하여 각자 독특한 문화를 전개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발해만에서 풍이족을 주축으로 하여 한국이 일어났고, 후대에 와서 구려족(배달족)으 주축으로 하여 배달나라가 일어났고, 배달나라 이후에 동이족을 주축으로 하여 단군조선이 또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사기록이 없이 땅에 묻힌 홍산문화와, 유물이 없이 기록만 있는 한국과 배달나라 역사가 홍산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BC5000년경에 산동반도에서 신석기문화인 북신北辛문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북신문화는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다른 문화입니다. BC4500년경에 일어난 대문구大汶口문화와 연결됩니다. 이 대문구문화를 동이문화로 보고 있습니다. 황하유역의 청동기문화인 이리두二里頭문화는 하夏와 은殷의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 하와 은은 동이족의 나라입니다.
홍산문화 유물로, 여인상과 용을 추상화하여 조각한 옥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여인상은 남부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말타(Malta) 유적 등에서 다량으로 발견되고 유럽에서도 발견되는 여신상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 점이 당시에 홍산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 중국계 인종이 아니라 다른 인종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선조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알레스 흐들리카(Ales Hrdlicka) 박사는 “한국인은 신체적으로 백인의 특정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3가지 구분이 가능한 인종적 특질이 있다. 한 부류는 중국에 가장 인접한 지역에 살면서, 중국인과 비슷한 모습니다. 또 하나, 키가 작고 단단하고 피부색깔이 짙은 부류는 시베리아 토착민과 유사한 모습이다. 세 번째 부류는 한국민의 대부분을 점유하는데, 키가 더 크고 옅은 피부를 가졌다. 이 부류의 젊은 사람들은 뺨의 색깔이 홍조를 띠는데, 이는 몽고족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남성의 일부는 두부의 형상이 유럽의 고산족과 흡사하다. 이러한 백인과의 유사점은 한국인들의 조상 중에서 아시아계 백인의 계통이 숨어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인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안개 속의 미스터리이다. 그들은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로부터 현재의 반도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나 중국인들의 역사에 의하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부도지> 474~475쪽 윤치원)
고 쓴 말이 윌리암 R 콜린스가 쓴 고대인(Ancient Man)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윌리암 콜린스는 그가 쓴 글에서 한국인을 구성하는 종족으로 3가지 부류의 종족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중국인과 같은 모습의 인종, 둘째는 바이칼호 근처에 살고 있는 브리아트와 같은 인종, 세 번째로 유럽의 고산족과 같은 인종의 세 종류 인종의 혼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세 종류의 인종으로 한민족이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애초부터 단일 혈통의 단일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배달민족이라는 어휘를 분석해 보아도, 우리가 단일 혈통의 민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배달민족의 배달에는 3 가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뱀에서 태어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9,900년 전에 한국을 세운 풍이족風夷族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풍이족風夷族의 풍風자에 들어 있는 충자는 뱀을 의미하는 문자입니다. 풍이족은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둘째는 배가 다르게 태어난 종족이라는 뜻입니다. 배가 다르게 태어난 종족의 집단을 배달민족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맨 먼저 등장하는 종족명칭이 구황족九皇族입니다. 구황족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그 이름이 보입니다. 우리의 황해도 철무리굿 사설에 이상하게도 구황이라는 문자가 나옵니다. 구황족의 최고 어른을 구황대주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황대주님은 구황족의 후손으로서 굿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구한족九桓族입니다. 구한족은 한국을 세운 풍이족과 제국을 건설했던 모든 종족을 말합니다. 수메르도 이 구한족에 포함됩니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보다 먼저 지금의 이라크 땅에 정착한 종족입니다. 당시에 12제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2제국의 총체적인 명칭이 한국이었고, 한인을 한국의 천제라고 하였습니다.
구한족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배달족입니다. 배달족은 달리 구려족九黎族이라고도 합니다. 구려족도 역시 아홉 종족이라는 뜻입니다.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 때의 종족 명칭입니다.
구려족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동이족東夷族입니다. 동이족은 구려족의 변신입니다. 동이족의 중심이 되는 종족이 조선족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종족의 명칭이 이렇게 변천되어 왔습니다.
알레스 흐들리카(Ales Hrdlicka) 박사가 말한 “중국인과 같은 인종이 우리에게 많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성씨와 중국인의 성씨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컨대, 한국인 강姜씨나 중국인 강姜씨의 조상이 같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이들이 언어가 달라진 것은 오랜 세월을 나뉘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국인과 같은 인종이 있음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의 산동반도나 만주 쪽의 사람들입니다. 산동반도 쪽에서 온 사람들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중국 대륙과 인접한 바다를 통하여 들어온 사람들이라 한반도에서 생활이 가능해진 사람들입니다.
만주 쪽에서 온 사람들이 북한 쪽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배달민족으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으나, 치우천왕 유망 황제의 세 종족으로 갈라져 살기 시작하면서 동이와 하화로 헤쳐모여가 되어 오늘날의 한국인과 중국인의 조상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둘째로 러시아 토착민은 바이칼호 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브리아트와 같은 인종들입니다. 브리아트의 무속신앙과 우리의 무속신앙이 거의 같다는 점에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종이라는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리아트나 바이칼이라는 문자를 분석해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브리아트의 브리는 부르의 변음입니다. 부르는 불이고, 불을 부루와 같은 뜻입니다. 부루는 단군왕검의 장자로서 조선의 제2 대 단군이 된 분입니다. 브리아트는 단군왕검의 대를 이어서 제2 대 단군이 된 부루의 후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르는 우리 무속신앙의 무조巫祖가 된 분인데, 그들이 무조 부루단군의 신앙을 계승했다면 우리의 무속과 그들의 무속이 같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단군왕검의 후예인 조선족의 일부가 바이칼호 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고 보게 됩니다.
셋째로 서구인을 닮은 허여멀건 피부를 가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성씨가 우리나라 성씨의 중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입니다. 이들은 사천성四川省 보주普州쪽에서 이주해 왔는데, 그들의 조상은 드리비다어를 쓰며 인도 북부에 살던 드라비다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럽의 아리안계 종족인데, 흉노족이 인도의 북부를 침범했을 때, 흉노족에게 쫓겨 사천성으로 이주하였다가 한반도의 남쪽으로 와서 정착한 가락국 계열의 후손들입니다.
이렇게 한민족은 알레스 흐르들리카(Ales Hrdlicka) 박사가 지적했듯이 중국계와 러시아계와 유럽 고산족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땅에 순수한 단일혈통의 단일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은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이 살고 있던 땅도 산동반도나 만주에 국한되지 않았고 좀더 광범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문명을 연 문명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누려왔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원과 만주에 우리의 조상들이 오랜 기간 동안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묘제
<행복이>는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을 들고 있습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관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능원현 유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돌무덤들은 후에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석실묘(石室墓:돌방무덤), 지석묘(支錫墓:고인돌) 등으로도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이러한 묘가 만주일대와 한반도전역에 분포하여 있는데, 이것은 바로 고조선의 대표적인 묘제라는 것입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墓葬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殷)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土廣墓가 유행하였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곽묘木槨墓가 유행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한민족 고유의 산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5 호혜경제시대의 교역
행복이는 <삼성기> 상권의 글 “한웅은 팔괘를 그어, 象을 잡아 神을 움직였다. 熊氏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고(定婚家之禮), 짐승가죽(獸皮)으로써 돈(幣)을 삼고, 농사를 짓고(耕種-여러 곡식 종자로 농사를 지었다는 뜻), 가축을 기르고(有畜), 시장(市)을 열어 교역交易하였다” (답변자 주, 원문 번역을 일부 바로잡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답변자가 <행복이>의 분석과 다른 의견을 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행복이>는 경종耕種 유축有畜이 신석기시대 중반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문 번역에서 수피獸皮를 예물로 삼았다고 했는데, 답변자가 보기에 이 번역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돈으로 바로잡았습니다. 폐幣는 폐물幣物로 볼 수도 있으나, 본문에서 신시가 교역장소를 의미하므로, 경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서, 폐를 폐물로 보지 않고 돈으로 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장을 열고 교역을 하려면 재화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화폐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혼가의 예법을 정했다’는 부분에 대한 해석을 구석기시대의 무리중심사회에서 신석기시대의 가족단위의 씨족사회로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시장교역시대에 합당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답변자가 보기에 이 시대의 시장경제는 오늘날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전혀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호혜경제시대였으므로, 씨족사회 조직이 호혜경제의 특징인 계경제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계원을 모아 계 단위로 교역을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에 계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수피라는 화폐를 필요로 하였다고 봅니다. 예컨대, 계원 10명에 수피 10장이면 쌀 1말, 동검 1개 등의 교환기준이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6 배달나라의 근거지인 태백산 일대와 발해만 일대가 홍산문화 관련지역
<행복이>는 “홍산문화가 바로 한웅시대와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나서, “연대상으로 볼 때, 홍산문화가 B.C.3500~B.C.2200년까지로 여겨지고 있고, 한웅시대가 B.C.3898~B.C.2333년까지 이므로 서로 비슷하게 일치하고 있지만, 위치상의 문제로 한웅의 신시가 태백산 신단수아래라는 사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으로 보면(현재의 다수설) 홍산문화지역과 신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백두산이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홍산문화지역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보는 것은 기록상의 오류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三危太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에 있는 산명이고 태백산은 백두산임이 틀림없다. 삼위와 태백사이에 홍익할 만한 곳이니까 굳이 산악지대인 백두산근처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중국북부와 발해연안, 요녕지역 등 넓고 기름진 땅이 펼쳐진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삼위태백'은 '삼위산과 태백산의 (사이)지역'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신석기문화가 꽃피운 곳이고 한웅이 바이칼호 남부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동해 내려왔다고 보아도 지리적 여건상 위치설정이 타당한 곳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위산에서 태백산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이 사이에는 타클라마칸이라는 거대한 사막과 천산산맥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다클라마칸 사막으로 들어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답변자는 <단군신화>에서 삼위태백이라고 말한 것은 한인천제가 하늘에서 말한 것이므로, 삼위라는 별자리와 태백이라는 별을 말한 것으로 봅니다. 삼위는 28수의 북방현무칠수에 속한 위수3성이고, 태백은 태양계에 속한 금성입니다. 이 위수와 태백이 조응하는 곳이 발해만일대와 태백산 일대라고 봅니다.
<삼성기> 하권에는 “한국말에 안파견이 아래로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다’라고 하시며 한웅을 태백으로 파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태백은 별로서의 태백이 아니라, 바로 태백성이 조응하는 태백산을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태백산에는 금성을 숭상하는 신앙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삼성기>의 기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한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태백산정에는 <할아버지 호수>라는 호수가 있고, 누군가 북두칠성에게 제사지내는 사당도 언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의 토속신앙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여기가 신단수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행복이>는 <태백일사>의 삼한관경본기를 적절한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한웅천왕이 삼신에게 제사지내러 갈 때 태백산으로 간다"는 기록입니다. 그곳이 비서갑의 경내라고 하였습니다. 비서갑斐西岬은 부소갑扶蘇岬으로 한인천제의 62대 손이 되는 사람입니다. 부소갑이 아버지 소풍이 단국檀國의 홍제洪帝 때에 숙신肅愼에 정착하였으므로, (<진주소씨족보서문>)태백산은 숙신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배달나라의 제 14대 치우천왕이 청구국靑邱國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초의 청구국으로 비정되는 청구靑丘가 발해만 바다에 있다가 침몰하여 사라진 소머리 형태의 섬입니다. 사라진 청구를 그린 이 지도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청구섬이 침몰하므로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입니다. (신시연구가 장동균씨설)
[출처] 홍산문명이 과연 동이족의 역사인가? 에 대한 답변 |작성자 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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