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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천문학으로 증명된 단군시대

조금은 지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사학계는 선사시대터만 발견되어도 언론에 알리기를 위대한일인양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그렇게 외쳐되던 실증인데도, 거의 무시하는것을 보면, 참...참참참이다.

음..좀 그렇다는 생각이....하옇든 아래글들은 현대의 과학으로 밝혀낸것들이다.

물론 판단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시기를...

- 이 글은 월간 신동아 97년 2월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는 지난 94년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에 대한논문을 발표하기 1년전에 단군시대에 대한 천문기록을 이미, 연구발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의 경험이 삼국시대 천문기록을 검증하게 된 원인이 됐다는 것. 그러나, 그가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은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단군시대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단군을 신화시대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사서로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를 들수가 있다. 단기고사는 발해이 건국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엮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여기서는 역대 단군임금들의 행적등이 일일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자들로부터 위서(僞書)라는 낙인이 찍혀 외면돼 왔다. 이 서적들이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위서(僞書)라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군조선에 관한 책에도 천문현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아시아 제국들은 천체현상이 지상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주술적 믿음 하에 천체운행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책이 위서(僞書)냐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바로 당대의 천문현상의 현장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방법은 삼국시대 천문기록검증과 같은 식입니다. "

박교수에 따르면 이들 단군 역사서에는 모두 12회의 천문현상에 대한 기록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일식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로 가장 많고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등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결집현상, 그리고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 군데씩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제13세단군인 홀달단제 50년(무진년), 즉 BC 1733년에 다섯 개 별이 누성(동양천문학에서 표시하는 별자리 이름)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컴퓨터로 샅샅이 조사했다.

검정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1733년으로부터 바로 1년전인 B.C.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해 7월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고,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별빛이 한층 찬란하게 빛났다. 천문학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한편 B.C.1733년을 기점으로 하여 오행성이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80년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도표) 단군조선시대의 천문현상 기록 일람표

순서

시기

기록내용

비고

1

2세 단군 부루58년(B.C.2183)

일식

?

2

13세단군 홀달 50년(B.C.1733)

오성취루

1년오차

3

17세단군 여을 20년 여름(B.C.1533)

일식

?

4

29세 단군 마휴 9년(B.C.935)

남해 썰물

4년후 실현

5

6세 기자 2년 7월(B.C.918)

일식

4년후 실현

6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B.C.837)

일식

4년후 실현

7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B.C.765)

일식

연도 일치

8

19세 기자 1년 봄(B.C.579)

일식

연도일치

9

39세 단군 두홀 21년 8월(B.C.525)

일식

월까지 일치

10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B.C.423)

일식

월까지 일치

11

47세 단군 고열까 48년(B.C.248)

일식

연도 일치

12

36세 기자 인한 35년(B.C.241)

일식

연도 일치

박교수는 " 기록연수가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계산법과 3천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계산 결과 0.007%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이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모두 제 29세 마휴단제 9년 (B.C.935년)때 "南海潮水退三尺"이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조수면의 변화는 달과 태양의 조석력에 의해 일어나므로 천체운동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오행성 결집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931년 11월 22일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일식기록에서도 4년의 오차가 바생한게 2건이나 된다는 점이다. B.C.935년에 근접한 일식 기록으로는 6세 기자임금 2년(B.C.918년) 7월의 기록과 32세 단군 추밀 13년(B.C.837년) 3월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때에는 일식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확히 4년후에는 각각 대응시킬 수 있는 일식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연대 계산상 오차가 있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통계적으로 체계적인 오차라고 한다. -편집자주) 단군시대 일식과 관련해 박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사실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는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2183년에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400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개의 일식기록중 5개의 기록(4년후로 계산한 2개의 기록까지 합치면 모두 7개)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2개는 연도뿐 아니라 월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일부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동안 일본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적으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왜곡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여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히 단군 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록은 중국보다 월등히 앞선 연대이기 대문에 중국 기록을 베낄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서들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되었다는 점도 있으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박교수의 연구는 그동안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실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중략)이처럼 한 천문학자의 집요한 연구결과가 기존의 학문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학문들이 분할돼 자기의 영역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인접 학문들과 공동보조를 맞추면 의외의 소득을 거둘 수 있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준 것읻. 그러나, 박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사학자들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학계의 반응

삼국시대 천문관측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후 국사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천문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근거 없는지를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결과만 놓고 말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들만의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 천문학으로 증명된 단군시대

※ 보도내용과 발표논문을 복합인용 작성함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기법으로 시각화했다.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루성(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남해조수퇴삼척(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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