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연개소문 초상화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한 바 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해 구 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열전> '연개소문' 편에는 포악하고 잔인하여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으며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서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국사를 전횡, 당태종이 이를 정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7세기 중반에 동아시아의 패권에 대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아닌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과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격돌의 현장을 통하여 알아보자.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중국의 경극에서는 당태종이 고구려 동정에 나섰다가 연개소문의 병사에 쫓기게 되어 어니하(泥河, 진흙뻘강, 중국의 여러 곳에 있음)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붙잡혔는데, 연개소문이 항복하면 큰상을 내리겠다고 하며 항복을 종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연개소문이 중국 사람들에게 각인된 형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경극 속에서는 그런 위기에 처한 당태종을 설인귀가 나타나서 연개소문을 무찌르고 당태종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경극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림) 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
ⓒ브레이크뉴스 중국 대륙을 휩쓴 연개소문중국의 장성이남에서 연개소문이 당태종 당나라 군사와 싸운 기록들을 보자. 산동성 봉래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현의 성 남쪽 묘산의 아래의 개울에 몸을 숨겼다가 날이 밝아 가마를 정비하고 서남쪽의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진 후 투구와 갑옷을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 전투에서 당태종의 형이 전사하였다.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했던 고성, 당태종 형의 사당인 대왕묘, 식수가 모자라 판 우물인 일검천, 당태종이 패하고 숨은 왕구촌, 당태종의 가마가 빠진 락가하, 투구와 갑옷을 말린 쇄갑하 등의 유적과 지명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산동성 즉묵시 마산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마산대전이 있었는데, 당나라 장수 김걸이 사망하고 당태종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는데, 이는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으며 마산에는 지금도 연개소문이 주둔하던 대왕구와 김걸장군의 사당인 대왕묘가 남아 있다.강소성 염성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 우물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났는데 목숨을 건진 것에 감격하여 그 우물터에 몽롱보탑과 정혜사를 세웠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강소성 태주에 호국사가 있는데 당태종이 역시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칠성장에 숨어 있다 살아나서 나중에 세운 절 이름이다. 강소성 숙천에는 고구려 연개소문 부대가 당나라 설인귀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장군동, 망을 보던 장대와 찬밥을 먹던 냉반대, 과광산, 오자산 등의 유적이 있으며, 고구려 군사가 주둔하던 청량원이 있다. 인근의 묘에서는 1996년에 투구와 철검 등이 출토되었다 한다. 강소성 비주에도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유적이 있다.이 밖에도 북경 유역과 다른 지역에도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위의 기록들은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 낸 연개소문의 대륙에서의 활약을 발췌해서 요약한 것으로 기존의 학계에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들이다.이는 중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황제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당태종이 그들의 사서에서 ‘정관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위업을 달성하고 당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를 하고 있지만 중국 현지 밑바닥에서 나타나는 기록과 유물들은 당태종이 그렇게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도망다니는 초라한 몰골의 당태종의 모습은 기존 사서의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군기가 빠진 오합지졸을 흔히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데 바로 위의 모습을 보면 그러하다.당태종의 항복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시성에서의 양만춘 장군과 당태종의 싸움에서 당태종이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고려시대의 이색은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의 물건 정도로 여겼으나 어찌 알았으랴 자기의 눈이 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을. 천추의 역사 속에 대담했던 양만춘이 화살로 용의 수염을 쏘아 눈동자를 떨어뜨렸도다”라고 노래하였다.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이때에 이세민(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하게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 양자강 유역) 모두 고구려에 속한다고 약속하였다”고 기록돼 있다.645년 5월 당태종은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생을 마감했다.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연개소문은 7세기 중반 당태종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고 실질적인 대륙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연개소문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한단고기에 인용된 것처럼 9살에 조의선인이 되었고 병사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항상 솔선수범했고, 법을 집행함에 엄정했으며,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전해져 올 정도로 병법과 지략에 뛰어났으며 고구려의 여러 부족과 백성을 총화단결할 수 있는 통치력과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지닌 진정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연개소문 같은 우리의 위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작업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흉악하고 잔인한 독재자 정도로만 알고 있는 연개소문은 7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패자였으며 고구려 역시 중원대륙을 섭렵하고 통치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종합지도) 산동성/강소성에 있는 고구려 연개소문의 흔적
(요약설명)-> 검색 연개소문 하시면 개별적인 내용들을 자세히 보실수 있습니다
(1) 산동성 봉래시(644년) : 연개소문과 당태종 격전지- 봉래인근에서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격전을 치루었는데 당태종 형이 전사를 한다
(2) 산동성 즉묵시 마산대전 (643년) : 연개소문과 당태종 격전지- 당태종이 산동성 즉묵시 마산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에 포위되어 사로잡힐 처지에 놓이자용양장군 김걸이 당태종을 극적으로 구출하자 태종은 줄행랑을 치고(?) 김걸은 연개소문에 대항하다 전사하다(김걸은 신라장군이라 한다 - 확인중)
(3) 강소성 비주 "애산" 전투 (627년 전후) :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 군과의 격전지
(4) 강소성 "숙천" 전투 :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 설인귀 군과의 격전지- 자치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 내용중 장산삼림공원(嶂山森林公园) 소개부분을 보면고구려 연개소문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전쟁을 하여 연전연승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내려온다
(5) 강소성 염성 "건호" :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격전지염성(鹽城)의 건호(建湖)현에는 몽롱탑(朦朧塔)의 전설이 있는데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 쫒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우물에 숨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자후에 이세민이 왕이 되어 거미줄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을 잊지 못해 감격하여 우물이 있던 곳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한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줘 목슴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이리하여 이 탑이 "몽롱보탑(朦朧寶塔)" 이라 불려졌다. 더불어 탑을 세운 후 비교적 큰 정혜사(淨慧寺)라는 절을 세웠다.1998년 이탑이 복원되었다
(6) 강소성 "금호" : 고려성이 있는 지역이다
(7) 양주 : 고구려 절세미인 아희와 수나라 양광(양제)와의 전설이 있는 곳 (단양주의 전설)
(8) 단양 : 단양주의 전설이 있는 곳(7번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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