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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훈민정음 창제 비화

세종 102권, 25년( 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기사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一百二終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100%창제는 아니었군요....

옛 전자라는것이 소위 말하는 가림토문자라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아래 재미있는 글귀를 소개합니다.

『한단고기』『단군세기』의 다음 기록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고조선 시대 3세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 2년(B.C 2,181년) 때의 일이다. 아직 풍속은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전하는 녹도문자(鹿圖文字)가 있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100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하인 삼랑(三郞, 삼신상제께 천제 지내는 관직)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셔서 정음 38자(字)를 만들고 이를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라고 하여 그 문자를 기록해 놓았다.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 38개를 가지고 운용하였고, 지금부터 4,183년 전(2002년 현재)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과거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에는 지금도 가림토 문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그 비석을 탁본(拓本)한 것이 높이 2m, 폭이 32㎝인 것을 보면, 실제 비석은 이보다 조금 더 클 것이다. 조선 선조때 조여적(趙汝籍)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도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든 을보륵(乙普勒)의 이름이 실려있다.

『단군세기』의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록과 함께 가림토(加臨土) 문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개량되기 이전의 한글 작품인 것이다. 이 문자의 모습은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배달국(倍達國) 시대의 녹도문자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이르러 제3세 단군이신 단군 가륵(嘉勒) 2년(B.C 2,181년)무렵에 가림토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조선(朝鮮)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된 것이다.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그 사용 빈도가 점점 줄어 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