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History

관미성의 위치.



원제: 삼국지의 조조가 알려준 광개토 대왕의 비밀 - 관미성전투

천하(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해양제국 대륙 백제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벌이는 관미성 전투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였습니다. 먼저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중국 역사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건 이병도학파를 빼놓고는 모든 민족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까지는 지면상 생략합니다.

당시의 정황은 백제가 양쪽으로 고구려를 협공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반도백제(본부)를 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요서백제를 먼저 칩니다. 이곳의 수군기지가 괴멸되지 않고는 반도백제를 공격할 수가 없지요. 황해 바다의 해상권을 쥐기 위함이지요.

요서백제는 전체 백제(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청 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친 이유가 바로 뒤통수에 있는 위험을 먼저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당시 배들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인근 바다를 통해서 가야 합니다. 요서백제를 이룩하기 전에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고구려의 육지 땅을 먼저 빼앗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해 광개토대왕은 우선 강력한 수군을 양성합니다. 수륙양공작전을 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이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키는데 20여일 이상이 걸렸다고 사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곳이 함락되면서 동아시아의 절대 패권은 광개토대왕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수많은 정복 전쟁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학자들도 관미성은 해상강국 백제의 강력한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이고, 이러한 관미성 전투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이상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관미성이 '강화도'라는 주장도 있고 또는 김정호의 대동지리에 오추산성을 관미성이라 표기했다 해서 오추산성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 천하제일관의 산해관

그러나 이것은 광개토대왕 비문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백제의 영토를 한반도 내로만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은폐 왜곡된 백제의 역사를 배워 온 이병도학파(식민사학자들)의 엉터리 의견입니다. 아무런 군사적 지식도 없이 무조건 일본 사학자들이 가르쳐 준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 곧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전쟁은 해전에서 결판이 납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한 나폴레옹이 그랬고, 임진왜란 때 일본이 이순신장군과의 해전에서 이기지 못해 결국 패했습니다.

해군에 대한 군사적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알 수 있듯이, 강화도는 수군기지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수군기지는 육상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육지와 가까운 섬에다 수군기지를 두어야 합니다. 한산도가 이순신장군의 수군기지였듯이....

그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인천 앞바다 육지에 수군이 상륙을 해야 하는데, 밀물 때도 수심이 얕아 접안이 안 됩니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널 때 부교의 길이가 약간 짧아 강을 못 건너 그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강도 이럴진데 하물며 바다야 오직하겠습니까! 당시 현대전의 상륙정인 L.V.T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사 기발한 방법으로 상륙을 했다 하더라도 썰물 때에는 먼 바다로 배가 나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상륙 부대의 보급로와 퇴로가 끊겨 마치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형상이 됩니다. 이러한 무모한 작전을 병법에 능한 광개토대왕이 했을 리가 없습니다. 배수의 진이란 전력상 불리한 쪽이 옥쇄를 각오하고 죽음으로 수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택하는 진법인데 공격하는 쪽에서 배수의 진을 친다는 것은 병법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 국가의 중요한 수군기지를 두었다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강화도는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20여일 이상이나 걸려 필사의 공격을 해야 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가 아닙니다. 강화도에 가 보시면 알 수 있듯이 그곳이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입니까?

일단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광개토대왕 비문을 위조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려 했고, 설사 대륙백제가 있었다고 인정을 한다 해도 요서백제의 지배지였던 곳에는 그럴만한 섬이 없다는 이유로, 백제의 영토 중 강화도 이외에는 수군기지가 될 만한 곳이 없다고 했을 겁니다.

그럼 어디에 강력한 해상제국 백제의 수군기지가 있었을까요?

(이 의문의 해답을 삼국지의 조조가 알려 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주목적은 자원을 얻는데 있습니다. 현대는 석유전이나 옛날에는 철을 얻기 위해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고구려도 철을 얻기 위해 중국과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진시황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습니다. 그 만리장성의 동쪽 시발점이 되는 곳이 현재 중국의 해안도시 하북성 秦皇島(진황도)입니다. 그럼 왜 진시황은 하필이면 진황도 부터 만리장성을 쌓았을까요?

진황도의 옛 지명은 碣石이었습니다. 갈석은 철을 의미합니다. 철은 녹이 슬면 갈색입니다. 갈석(진황도)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중요한 철의 산지입니다. 이곳의 철을 지키기 위해 중국은 예부터 많은 병력을 보내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고구려의 영토는 요하(랴오허)강 동쪽으로 요동이란 단어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광개토대왕 이전에 단 한번도 요하를 지나 서토를 점령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갈석(진황도)의 철을 지키기 위한 중국의 수비가 견고했기 때문이지요.

백제가 강력한 수군을 앞세워 요서백제를 얻은 이유도 철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서백제가 있었던 진황도에 가보면 山海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天下第一關으로 산해관은 명나라 때 청나라를 막기 위해 증축된 관문입니다. 이곳은 글자 그대로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입니다. 깊은 바다와 가파른 산이 바로 만나는 곳으로 바다와 거의 붙어 있는 산의 이름이 글자 그대로 角山입니다. 이곳이 지형적으로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이 여기에 장성을 쌓았고, 명나라가 이곳을 증축해 청나라의 침입을 막은 겁니다. 공격 병력의 1/10 이나 1/20 만 있어도 아니 1/100 만 있어도 수비가 가능한 곳이지요.

잘 아시는 청(후금)나라를 세운 태조 누루하치도 당시 천하무적인 팔기군을 가지고도 이곳을 못 뚫고 산해관의 전초기지격인 영원성에서 입은 부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죽습니다. 누루하치의 아들인 태종 후앙타이지(조선에 병자호란을 일으킴)도 산해관이라는 난공불락의 천연요새 때문에 중원을 얻지 못하고 속상해 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이 천하의 두 영웅도 못 뚫은 곳이 산해관입니다.

중국 역사상 광개토대왕 이전에 단 한번도 동북의 이민족에게 이곳을 돌파당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難攻不落의 천연요새입니다. 광개토대왕 이후로도 돌파 당한 적이 없습니다.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해 도망갈 때도 고구려 군은 이곳에서 추격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물론 항복은 받았지만)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의 하나가 여기에도 있는 겁니다.

현대북경자동차가 지금 있는 부근에 북경시 순의구 高麗營진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배운 이병도학파는 이곳이 고려 때 고려인이 이주해서 생긴 지명이라고 일본이 가르쳐 준대로 말하고 있으나, 예전에 고구려는 고려로 중국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營이라는 한자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중국의 내몽고까지 정복한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은폐 축소하기 위한 억지이지요.

“갈석(진황도)은 철의 산지이고, 만리장성과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산해관이 있고, 현재 중국 최대의 산업항이고, 중국 최대의 선박수리공장이 있고,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00명을 떠나보낸 유명한 항구이지만, 현재 섬이 없기 때문에 수군기지가 될 수 없다”고 하면 솔직히 그동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진황도는 진시황과 관련이 많아 진시황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입니다.)

그래서 저희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는 거기에 가서 몇 년간 있으면서 진황도가 섬이 라는 단서가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습니다. 秦皇島라는 지명의 도는 분명 섬 ‘島’ 자인데 왜 섬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산동성 청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던 중 진황도 외곽에 있는 碣石山이라는 곳에 올라가 진황도항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중국의 유명했던 황제들은 다 이곳을 들러 갈석산에 올랐을까 하면서... 한무제, 위무제(조조), 당고조 이연, 당태종 이세민, 청 건륭제 기타 수많은 황제들이 이곳을 들른 이유는 예부터 이곳은 워낙 중요한 철의 산지라 이곳의 국경수비군을 격려하기 위함이었고, 중국 입장에서 오랑캐(고조선/고구려)와의 전쟁을 하는 길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삼국지의 조조가 바람결에 광개토대왕의 비문의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래는 삼국지의 위무제 조조가 서기 207년 동쪽을 징벌하여 요서의 오환족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렸다가 시 한 편을 남깁니다. 갈석은 진황도의 옛 지명입니다.

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澹澹 山島諫峙

樹木叢生 百草風茂 秋風蕭瑟 洪波湧起

日月之行 若出其中 星漢燦爛 若出其里

幸甚至哉 歌以詠志

동으로 갈석에 이르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 바다는 어이 이리도 출렁이고 산과 섬은 우뚝 솟았는가

수목은 울창하고 백초는 무성하네. 가을바람 소슬한데 큰 파도가 솟구치누나.

해와 달의 운행은 이 바다에서 솟고, 은하수의 찬란함은 이 바다에서 떠오르네

그 얼마나 다행인가 노래 불러 뜻을 읊노라.

위 시에 보면 진황도(갈석)는 예전에 섬이었다는 분명한 사실이 나옵니다.

“바다는 어이 이리도 출렁이고, 산과 섬은 우뚝 솟았는가”

산은 산해관의 각산(角山)입니다.

조조 선생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 덕분에 광개토대왕의 비밀을 풀게 되었습니다.

선생 덕분에 대륙백제의 의문을 풀게 되었습니다.

선생 덕분에 잃어버린 한국고대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선생 덕분에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홍순주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회장]

재미있는 지도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아래 지도에 보면은 우리 백두산이 있고, 중국애들이 부르는 장백산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도입니다.



'역사-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민정음 창제 비화  (0) 2009.12.03
60가지의 우리역사 미스터리  (0) 2009.11.20
백제 수도 위례성의 위치...  (1) 2009.11.15
천문학으로 증명된 단군시대  (0) 2009.10.15
홍산문명이란...  (0) 2009.10.14